야마가타성과 역대 성주
모가미(最上) 씨의 시조 · 시바 가네요리(斯波 兼頼)
~세이와 겐지 족보~
시대는 남북조(南北朝) 시대.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 尊氏)와 같은 세와 겐지(清和源氏)의 계통을 이어받은 시바 가네요리(斯波 兼頼)는 북조 세력의 장으로서 활약한 후 엔분 원년(1356)년에는 우슈탄다이(羽州探題)로서 모가미 관청 소재지 후추 야마가타에 입부합니다. 이곳을 정치의 거점으로 정한 가네요리는 다음 해부터 야마가타성 축성을 시작하고 신사 불각 부흥 등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 정책으로 민심의 안정을 도모, 야마가타 성하도시의 기초를 다집니다.
그 후 자손은 무로마치 막부로부터 「모가미 야가타(最上 屋形)」라는 칭호를 하사받고 모가미(最上) 씨를 칭하게 됩니다. 가네요리(兼頼) 시대부터 약 170년 후의 덴문 15년(1546년), 모가미 요시모리(最上 義守)의 적남(嫡男) 모가미 가문 11대 당주 모가미 요시아키(最上 義光)가 탄생합니다.
모가미 요시아키(最上 義光)의 활약
~기타노 세키가하라 게이초 데와 합전~
요시아키는 유년 시절부터 용감하며 무예가 뛰어났으나 모가미 가문의 내분과 근린 영주와의 불화 등으로 청년 시절에는 수많은 어려움에 휩쓸립니다. 그러나 16세기 말에는 현재 야마가타현 무라야마 · 모가미 지역을 다스리게 됩니다.
게이초 5년(1600년), 요시아키는 천하를 겨루는 일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에 가담, 「기타노 세키가하라」라 불린 게이초 데와 합전에 참전합니다. 도요토미정권의 고다이로(五大老 5명의 다이묘)이자 서군의 유력 다이묘였던 우에스기 가게카쓰(上杉景勝)는 그의 중신인 나오에 가네쓰구(直江兼続)에게 2만5천여 군세를 맡기고 야마가타로 쳐들어가 지성 하세도성으로 맹공을 퍼부었습니다. 전력으로 수비하는 요시아키와의 일진일퇴의 전투는 보름 동안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세키가하라에서의 동군 도쿠가와 군의 승리를 알게 된 나오에 가네쓰구는 퇴각. 그 후, 요시아키는 이에야스에게 57만 석의 영지를 인정받게 되어 실질 고쿠다카(경제력을 쌀 생산량으로 환산한 제도)가 100만 석이라고도 일컬어지는 영지를 건설합니다.
요시아키와 전국 무장들과의 친분
천하를 얻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 秀吉)로부터 「하시바데와(羽柴出羽) 시종」의 지위를 하사받고 도호쿠의 유력 다이묘(영주)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또,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와는 3살 차이로 나이가 가까워 신기하게도 서로 마음이 맞아 친분을 쌓았습니다. 이에야스가 좋아하는 매나 명마 등을 선물해 이에야스가 매우 기뻐했다는 일화가 남아있습니다.
인국 라이벌인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와는 최애하는 여동생 요시히메(義姫)를 통한 숙부·조카 관계이기도 했습니다. 덴쇼 14년(1586년) 오사키 합전 때처럼 때로는 표면적으로 적과 아군으로 갈라져 전투를 벌이고 때로는 수면하에서 격렬한 일촉즉발을 펼치는 등 긴장 관계도 있었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에 의한 덴쇼 20년(1592)의 조선 출병을 위한 규슈 나고야 재진중에는 과거의 대립을 없었던 것으로 하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게이초 데와 합전에서는 마사무네의 원군에 의해 형세를 뒤집었습니다.
야마가타번 초대 번주(영주)가 된 모가미 요시아키(最上 義光)의 성하도시 정비
야마가타의 성하도시는 야마가타성보다 표고가 높은 곳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마미가사키가와 강의 선상지라는 지형을 활용해 용수를 이용하여 마을의 우물과 논밭을 윤택하게 하고 저습지를 요새로 배치해 방위에 활용한다는 점을 우선했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야마가타번 초대 번주(영주)가 된 요시아키는 상업을 대대적으로 진흥했습니다. 상인이 왕래하는 우슈(羽州) 가도는 남쪽의 우에마치로부터 시작해 이쓰카마치, 요카마치, 도카마치, 요코초, 나노카마치, 하타고마치, 무이카마치, 욧카마치 거리, 북부 미야마치로. 또, 장인의 마을로서 자이모쿠마치, 긴마치, 로소쿠마치, 누시마치, 히모노마치, 오케마치, 가지마치를 두어 상업 도시로서의 발전에 이바지했습니다.
모가미(最上) 씨 이후 역대 성주들
요시아키 사후에 일어난 모가미 가문 소동 이후, 겐나 8년(1622년)에 모가미 가문이 개역(면직)되자 야마가타번에서는 도리이 다다마사(鳥居 忠政)에 의한 통치가 시작됩니다. 다다마사는 야마가타성의 대규모 개수를 시행해 거의 현재 모습의 원형을 쌓았고 사원의 배치 변경과 검지(検地), 현재의 분쇼칸 주변에 흐르던 마미가사키가와 강의 흐름을 바꾸는 대공사를 추진했습니다.
도리이 씨에게 후사가 태어나지 않자 대신 제2대 장군 도쿠가와 하데타다(徳川 秀忠)의 자식 호시나 마사유키(保科 正之)가 야마가타에 입봉 합니다. 마사유키는 7년간의 치세 속에서 정력적으로 도읍 만들기를 추진하고 영내의 측량과 유통망 정비, 마미가사키가와 강 붕괴에 의한 홍수와 흉작에 힘겨워하는 백성들에게 어진 인정을 베풀어 명군으로 불렸습니다.
마사유키가 아이즈로 이동한 후 마쓰다이라 씨부터 홋타 씨, 아키모토씨, 미즈노 씨 등, 모두 후다이다이묘(대대로 도쿠가와 가문을 섬겨 온 영주)로 이어졌습니다.
일찍이 「모가미 가문 57만 석」을 자랑한 야마가타번은 에도막부 말기 무렵에는 5만 석까지 감소. 성곽이 광활한 야마가타성을 유지하기 위해 역대 성주들은 기지를 발휘하여 지혜롭게 극복했다고 합니다.